기술

계약 범위 밖이었지만 '범위 밖'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2026.10.067분 읽기

고객사에 넘긴 업무 시스템을 현장에서 실제로 돌리기 시작하면 요구가 쌓입니다. 새 기능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쓰다 보니 걸리는 지점들입니다. 계약서를 펴 보면 이런 것들은 범위 밖이고 따로 협의하자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요구들을 무상으로 처리하기로 정했습니다.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고, 앞으로 이어질 관계를 생각하면 그 편이 나았습니다. 처리 방식은 금방 정해졌습니다. 남은 문제는 이걸 고객에게 어떤 말로 꺼내는가였습니다.

결국 말을 고르는 데 더 오래 걸렸습니다. 결론부터 적으면 '계약 범위 밖'이라는 말을 아예 꺼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꺼내는 쪽이 더 비쌌습니다.


같은 사실을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꺼낼 수 있는 문장이 두 개 있었습니다. 둘 다 거짓이 아니고, 둘 다 결과는 똑같습니다. 돈은 받지 않고 요구는 반영합니다. 다른 것은 상대가 그 문장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입니다.

구분

꺼낼 문장

문장의 성질

상대가 할 수 있는 것

A

'이건 계약 범위 밖이지만 무상으로 해 드립니다'

범위에 대한 주장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B

'쓰시면서 나온 것들 정리해서 반영하겠습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서술

동의할 것도 거부할 것도 없다

A 문장에는 '범위 밖'이라는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판단은 상대가 받아들여야 성립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조항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돈을 받지 않기로 이미 정해 놓고 분쟁을 사는 셈입니다.

B 문장에는 판단이 없습니다. 넘긴 시스템을 쓰다가 나온 것들이라는 사실만 말합니다. 사실에는 동의를 구할 자리가 없으므로, 상대가 반박할 지점도 생기지 않습니다.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두 문장을 주장과 사실로 나눠 비교한 그림


주장은 반박을 부르고 사실은 안 부릅니다

갈림선은 하나였습니다. A 문장의 '범위 밖'은 주장이고, B 문장의 '쓰시면서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주장이 섞인 문장은 상대의 동의를 전제로 합니다. 동의가 필요한 문장은 언제든 협상 자리가 됩니다.

협상 자리가 열리는 것 자체가 비용입니다. 조항을 어떻게 읽을지 맞추는 데 서로 시간이 들고, 그 대화가 길어지면 원래 하려던 일이 미뤄집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얻을 금액은 0원입니다. 무상으로 처리하기로 이미 정했기 때문입니다.


생색에는 금액이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A 문장을 꺼내서 얻는 것을 적어 봤습니다. 하나였습니다. 범위 밖인데도 해 줬다는 사실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 생색입니다.

생색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돈 없이 해 주는 자리라면, 그 사실을 상대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음 협상에서 차이를 만듭니다. 문제는 이번 건에 그 차이가 붙을 자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처리하기로 먼저 정했으니, 생색에 걸려 있는 금액이 0원입니다.

그래서 계산은 단순해집니다. 한쪽은 0원을 얻고 분쟁 가능성을 사고, 다른 쪽은 0원을 얻고 아무것도 사지 않습니다. 다툴 실익이 없을 때 표현을 양보하는 것이 가장 쌉니다. 이건 호의가 아니라 셈입니다.

계약 조항은 그대로 뒀습니다. 안에서 근거로는 계속 쓰고, 밖으로는 먼저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 정한 내용입니다. 상대가 계약을 근거로 더 요구해 오면 그때는 꺼내야 합니다. '먼저 꺼내지 않는다'와 '영원히 쓰지 않는다'는 다릅니다.


양보하면서 같이 못 박은 것이 둘입니다

이 건을 본 검수와 묶지 않습니다. 양보는 하되 관문은 따로 둡니다.

범위는 기간으로 끊습니다. 목록이 닫히지 않는 일에는 끝선을 금액 대신 기간으로 둡니다.

표현을 양보하는 것과 일정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무상으로 더해 준 일이 본 검수와 묶이면, 그 일이 늦어질 때 검수와 정산과 후속 일정까지 같이 끌려갑니다. 그러면 호의가 발목이 됩니다. 그래서 말은 부드럽게 하고 관문은 분리했습니다.

분리를 말로만 하면 상대는 한 덩어리로 봅니다. 저는 일정 추적을 두 건으로 나눠 걸었습니다. 하나는 요구를 모아 범위를 확정하는 일, 하나는 개발을 끝내는 일입니다. 나눠 두면 앞의 것이 늦어도 뒤의 것의 완료 판정이 흐려지지 않고, 어느 쪽이 멈춰 있는지가 각자 보입니다.

무상 대응 건을 본 검수 일정에 묶은 경우와 분리한 경우를 위아래로 비교한 그림


목록이 닫히지 않으면 기간으로 끊습니다

'쓰시면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는 끝이 없습니다. 쓰는 동안 계속 나오기 때문에 목록이 닫히지 않습니다. 금액으로 끊으려면 다시 범위 이야기를 꺼내야 하고, 그러면 방금 피한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기간으로 끊었습니다. 한 번에 들어올 만한 기간을 정하고, 그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범위를 닫았습니다. 나중에 거절할 일이 줄어듭니다. 기간이 지난 뒤에 들어온 요구는 범위 밖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고, 다음 묶음으로 가면 됩니다.

닫히지 않는 요구 목록을 기간으로 끊어 한 묶음으로 닫는 과정을 그린 그림


돈을 받아야 하는 일에는 그대로 쓰지 않습니다

이 선택은 무상으로 처리하기로 먼저 정했을 때만 성립합니다. 비용을 청구할 일이라면 반대로 가야 합니다. '쓰시면서 나온 것'이라고 부드럽게 말해 두고 나중에 청구서를 내밀면, 앞말과 뒷말이 어긋납니다. 상대 입장에서는 없던 조건이 뒤에 붙은 것으로 읽힙니다.

유상으로 갈 일이면 처음부터 범위 밖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쪽이 맞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상이 열리는 것은 비용이 아니라 당연한 절차입니다. 받을 금액이 걸려 있으니 다툴 실익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쪽을 써 두고 뒤에서 조건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비쌉니다.

남는 위험도 하나 있습니다. 양보가 반복되면 선례가 됩니다. 말하면 해 주는 곳으로 읽히면 다음 요구의 기준선이 내려갑니다. 범위를 기간으로 끊고 추적 단위를 따로 둔 것이 완충이지만, 그걸로 충분한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같은 자리에 서면 이 순서로 봅니다

이 일을 무상으로 할지 유상으로 할지 먼저 정했는가 — 표현은 그 뒤에 고른다

꺼낼 문장에 상대의 동의가 필요한 판단이 섞여 있는가

그 판단을 꺼내서 얻는 것에 금액이 걸려 있는가, 생색뿐인가

양보한 일이 계약이 보장한 관문과 한 덩어리로 묶이지 않는가

양보한 범위에 끝선이 있는가 — 목록이 안 닫히면 기간으로 끊는다


문장 하나에 쓴 시간

무엇을 해 줄지는 금방 정해졌고, 어떻게 말할지에 시간이 더 들었습니다. 결과는 같은데 상대가 그 문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무상으로 하기로 먼저 정했다면,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두 표현 중 반박을 부르지 않는 쪽이 쌉니다.

계약서는 그 자리에서 꺼내지 않아도 효력이 남아 있습니다. 조항은 제가 안에서 판단할 때 쓰는 근거이고, 밖으로 꺼내는 순간 협상의 재료가 됩니다. 꺼내지 않고 양보하되 관문과 끝선은 그대로 두는 것이, 이번에 제가 고른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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